사람들은 저마다 삶에서 원하는 것이 다르다.

원하는 것이 같은 경우도 얻기 위한 방법이 다르다.

원하는 것이 다른 사람끼리는 무시하고 방법이 다른 사람끼리는 싸운다.

왜 원하는 것이 다 다른가? 원하는 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왜 방법이 다 다른가? 생각이 짧고 지식이 짧아서 모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방법만이 문제라면 언젠가 해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원하는 것이 다르고, 거기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를 찾아 봐야 없다. 왜 행복해야 하는가? 왜 남들이 행복해야 하는가?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애초에 왜 우리에게 고통이 있는가? 왜 없애야 하는가? 왜 우리는 본능이 있는가?

왜 우리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가?

이유가 없음에도 우리는 분리감을 느끼고 더 명확히 분리되기를 원하거나 아예 합쳐지기를 원한다.

모든 질문의 시작은 분리에서 온다. 관찰자와 대상이 나누어진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우리는 그럼에도 남들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왜?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옳은가? 나란 말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이다.

여기 이러고 있는 나의 생각에는, 우리가 하는 모든 판단의 앞에는 '내 생각에는' 을 붙여야 한다.

죽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영혼도 윤회도 실존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죽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따름이다.

by gloine | 2009/04/12 13:42 | | 트랙백 | 덧글(2)

생명이라면 본능적으로 행복을 원한다.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이성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이 무의미를 외쳐 봐야 원하는 것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 행복이란 말인가?

우리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그 찰나에 잠시 동안 행복을 느낀다.

원하는 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일단 원하던 것이면 행복을 준다.

반면 아무리 귀중한 것이라도, 원하지 않던 것이면 행복을 주지 않는다.

배부르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행복을 주지 않는다. 배고프면 식은 짜장면 한 그릇도 행복을 준다.

다시 말해서, 행복이란 자신의 현재 상태에 상대적인 것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항상 오늘보다 약간 나은 내일이 있는 것이 하루 아침에 왕이 되는 것보다 낫다.

그럼 질문을 해 보자. 지구에는 한정된 자원이 있다.
이 자원으로 전 인류를 최대한 오래 행복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답은 이렇다.
자원을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시킨 후, 시간이 가면서 다수의 사람에게 조금씩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원을 비슷하게 가진 사람끼리 주로 교류하도록 만든다.

이러면 자원을 많이 가진 소수는 계속해서 불행하고, 자원을 적게 가진 다수는 계속해서 행복하다.
(그동안의 현대 사회는 다행히 자원의 양도 늘어나 주어서 많이 가진 소수도 행복할 수 있었다.)

만일 자원을 공평하게 나눠 주면? 모두에게서 더 나은 내일이 사라지고, 모두가 불행해진다.

공평이란 항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공평한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은 너무 많아서도 안 되고 너무 적어서도 안 된다.

by gloine | 2009/02/08 05:59 | | 트랙백 | 덧글(9)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의미없는 일이지만 다른 짓도 의미없기는 매한가지다.

사람은 살아가며 매 순간마다 대상의 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한다.

'나는 베토벤보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좋아.' 와 같은 개인에 국한된 것에서,
'살인은 나빠.', '약한 사람을 돕는 것은 좋아.' 와 같은 사회에 관련된 것들도 있고,
'모피 코트를 입는 것은 나빠.', '바다를 보존해야 해.' 와 같은 사회에서 벗어난 것들도 있다.

판단의 기준은 보통 특정 대상의 삶에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이다.

놀랍게도 인간에게 있어서 이 대상은 자신의 몸에서 1 cm 떨어진 곳까지가 될 수도 있고,
주변 수십 명을 아우를 수도 있고, 수천만 명이 포함되는 국가가 될 수도 있고,
수억 명을 아우르는 종교가 될 수도 있고, 수십억 명이 포함된 지구가 될 수도 있다.

판단의 대상이 넓은 사람은 더 많은 대상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반대로 더 많은 대상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철저히 개인 본위의 살인자가 평생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수십 명이다.
국가를 생각하는 지도자가 한 달 동안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수천 명이다.

하지만 살인자가 행복하게 한 사람은 한 명이다.
그리고 지도자가 행복하게 한 사람은 수천만 명이다.

단순히 크기의 셈으로 따지자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더 강한 힘으로 더 넓은 대상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또는 옳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어떤 삶인지 모른다.
우주 입장에서 지구의 존재 의미는 모기의 단련을 위해 문명화된 인간을 사용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우주인에게 모기 재배소의 인류의 정의 따위는 우주 인권에 포함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돌아오는 곳은, 개인과 그 지각 범위 안의 존재에 대한 행복이다.
결국 인류는 기껏해야 작은 별의 껍질에 사는 수억 종의 생물들 중 한 종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아니면 누가 인류의 행복을 위할 것인가?

by gloine | 2009/02/03 17:43 | | 트랙백 | 덧글(0)

어쨌든 논리적 사고의 결과가 나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내가 도저히 그냥 살아갈 수 없는 이유는 단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삶은 어느 순간부터 무엇을 하건 온전한 만족을 느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맛있는 것을 먹건, 새로운 게임을 하건, 연구를 하건, 애인을 사귀건, 머지 않아
'그래서 뭔가 좋긴 한데 어쩌라는 거지?' 라는 회의적인 기분이 들어서 그만둔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의미가 없게 느껴지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 의미가 없더라 이것 뿐이다.

그나마 가장 저 회의적인 기분이 덜 느껴질 때가 연구를 할 때라서 보통은 연구를 한다.

하지만 지식을 얻어서 무언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없어진 지 오래이고,
그저 새로운 정보의 조합을 만드는 것이 주는 반짝하는 즐거움을 얻으려 돌아다닐 뿐이다.

더 비참한 것은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굶다가 고통을 참지 못해서, 결국은 무언가를
입에 구겨 넣게 된다는 것이다.

무의미함과 굶주림 사이에서 진동하며 괴로워하는 인생이다.

by gloine | 2009/01/25 22:38 | | 트랙백 | 덧글(2)

이 마음은 끊임없이 세상에 영향을 줄 만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쓴다.

자동 기계처럼 돌아가는 생각은 계속 만들어 낸 새로운 것에 뛰어 들어가고,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영향력 있는 것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한다.

톱니바퀴를 잠시 끊는 것은 지나치게 배가 고프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여자가 고플 때 정도이다.

저것 뿐이라면 저렇게 살면 된다. 고픈 것을 이래저래 채워 나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종종 찾아오는 것은 고픔으로부터 촉발된 왜라는 질문, 그리고 항상 따라오는 허무감이다.

왜 이것들을 얻으려 하는가.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정말 없는가.

이유가 없으면 도대체 무슨 짓인가. 설계대로 사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설계에서 뛰어 나가면 사는 것이 아닌 것인가. 뛰어나가 원하는 것이 없어지면 생각은 하게 될까.

생각하는 것이 없어도 산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생각이 사라지면 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by gloine | 2009/01/17 04:04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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